몇 초 안에 ‘얻긴 뭘 얻어 여가 시간 재미나 좀 보고 마는 거지’라는 답변을 듣기 십상인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른 이유는 한 동영상 때문이다. 공식 취미 생활 ‘독서’ 정도는 가볍게 눌러버릴 정도로 수 많은 사람들의 비공식으로 채택한 취미 생활일 ‘게임’을 통해 단지 시간 때우기 이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질문의 답을 생각해보기 전에 그 동영상을 여러분께도 소개시켜드리고자 한다. TED2010에서 게임 디자이너 제인 맥고니걸이 게임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내용으로 강연한 영상이다.
(TED는 과학 기술, 엔터테인먼트, 디자인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로 좋은 아이디어를 널리 퍼뜨리는 것을 모토로 삼는 비영리 재단이다. 사이트를 방문하면 저명 인사의 강연을 무료로 볼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번역된 자막의 도움을 받아 언어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 해당 동영상은 훌륭한 게임 자료를 번역하고 계시는 밝은해님이 번역을 담당했다.)
(자막은 View Subtitles - Korean 선택)
강연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대체 현실을 통해 실제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 중에서 내 머릿속에 질문을 이끌어낸 건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 게임에 몰입하며, 게임을 통해 어떤 능력이 발달하는가에 관한 부분이었다. 해당 부분에선 게임을 통해 현실에서 쉽게 얻기 힘든 긍정적인 피드백과 성취를 얻을 수 있어 현실에서보다 만족감이 높다는 점과 게임을 통해 낙관주의, 사회적 유대, 생산성, 자발적인 참여 등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 소개된다.
동영상을 모두 보고난 후에 게임의 장점을 지나치게 부각하고 부작용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게임 전문 블로그를 방문한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여러분은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너무도 익숙해 절로 반대 의견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장 뉴스 검색을 통해 범죄의 원인을 게임으로 돌리는 기사를 1분 안에 검색해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시간 낭비 말고 유용한 일에 에너지를 쓰라는 잔소리는 바로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능력은 직접 돈이 되는 능력과 동급으로 여겨지고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 훌륭한 재능이 돈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자조적으로 해당 능력을 잉여력이라고 부르는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 안타깝게도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모두 갖춘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누구나 무언가를 잘 할 수는 있지만, 모두의 능력이 돈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불행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진 능력이 서로 다르다. 인간이 본래 다양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다양한 능력 중 일부만이 인정받고 모두가 비슷한 능력을 가질 것을 강요받기 시작하면 열에 여덟, 아홉은 불필요한 사람이 되고만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뒤쳐진다는 생각은 쉽게 정신을 파고들며 극복해내기 어려운 상처가 된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좋은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거나, 이름이 알려진 직장에 다니고 있지 못하다거나, 먹고 사는 것과 직접 관련이 없는 물건을 많이 구입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뒤떨어진 사람으로 여기며 움츠러들고 심지어 고통까지 받는다면 그 사회를 ‘정상’으로 볼 수 있을까?
남이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는 걸 막을 수는 없다고 치더라도 자기 자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면 단지 불행만을 키울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다양성에 눈을 뜨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이 가진 다양성을 존중할 필요도 있다.)
그럼, 게이머로서 우리는 무엇을 잘 하는 사람들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능력이라고 정확히 집어내진 못하겠다. 강연에서 이야기한 낙관, 유대, 생산성, 자발성도 100% 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무언가에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건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개인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게임을 하며 나는 무엇을 하고 얻는가.
게임을 시작하면 되도록 빨리 끝내려고 하는 편이라 결정적인 공략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며 정보를 분석하는 작업을 하게된다. 게임이 주로 요구하는 능력 중엔 순발력이 있다. 지속적으로 빠른 반응을 요구받고 반복하면 순발력이 빨라지는 걸 쉽게 느낄 수 있다. 슈팅 게임의 경우 화면의 한 부분에 집중해선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운데 시선을 분산시키는 작업을 통해 시야가 넓어지기도 한다. 여러 가지 게임을 접할수록 게임이 가진 공통적인 요소들에 눈을 뜨게 되기도 하는데 이런 면 때문에 처음 접하는 상황에 빨리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물론 별 생각없이 머리를 비우고 게임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얻는 것은 있다. 무시하기 쉽지만 휴식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삶의 중요한 문제를 이어나가기 위해 쉬는 시간은 꼭 필요하며 지칠 때까지 하지 않는다면 게임은 좋은 휴식 거리가 된다.
생각없이 플레이해도 얻게되는 또 다른 것은 강연에서도 말한 바 있는 ‘성취’다. 우리는 누구나 행위가 적절한 성과로 이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성취감은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고 게임을 통해 쉽게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의 공격이 레벨업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수 많은 점프 숫자가 달성 목표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노력에 대한 즉각적인 보상을 받는다. 현실 세계에서 성적과 연봉을 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게임에서 하이스코어를 높이고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건 쉽게 할 수 있다. 때문에 현실에서 얻을 것이 없을 때 도피처로 쉽게 게임을 선택하게 된다.
정확히 무어라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수 많은 시간 동안 게임을 한 사람들은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어떤 일을 익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발달된 능력이 있을 것이다.
실화를 하나 이야기해볼까 한다. 눈이 갑자기 내린 어느날 안전 장비 없이 운전을 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급히 정지해야 할 상황에 닥쳤을 때 브레이크를 밟음과 동시에 차가 미끄러지는 것을 느꼈고 정면에 가드레일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간신히 클러치와 액셀, 핸들을 컨트롤해서 틀어지는 차를 제어해 한강에 떨어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란투리스모를 플레이해보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목숨을 구하는 정도로 극적이진 않더라도 삶의 어느 순간에 게임에서 얻은 능력을 활용하는 때는 꼭 찾아올 것이다. 그런 때가 찾아오지 않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적어도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달성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덧붙이기)
1. 지나간 300회 특집, 앞으로 쓰지 않게 된다면 400회 특집까지 이걸로 퉁칩니다.
2. 긴 글 읽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독해력, 인내력, 잉여력이 상승하였습니다.